오 (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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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吳)는 229년 손권이 황제를 칭하며 건국되어 280년 서진에 멸망하기까지 존속한 삼국 시대의 왕조이다. 손견과 손책 부자가 강동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손권 대에 이르러 촉한, 위나라와 대립하며 삼국 시대를 형성했다. 손권은 적벽대전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굳건히 했으나,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발생하며 쇠퇴했다. 손호의 폭정으로 인해 서진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오나라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갖추고, 농업, 상업,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멸망 전까지 고유의 문화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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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오 - 오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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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삼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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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일반 명칭 | 동오 손오 |
시대 | 삼국 시대 |
존속 상태 | 제국 |
정치 체제 | 군주제 |
역사 | |
시작 사건 | 조위로부터 독립 |
시작 연도 | 222년 |
주요 사건 | 손권 황제 즉위 |
주요 사건 연도 | 229년 |
종료 사건 | 서진의 오 정복 |
종료 날짜 | 280년 5월 31일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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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
현재 국가 | 중국 베트남 |
수도 | |
수도 | 무창(222년–229년, 265년–266년) 건업(229년–265년, 266년–280년) |
인구 | |
238년 | 2,567,000명 (논쟁 중) |
280년 | 2,535,000명 (논쟁 중) |
인구 규모 관련 설명 | 태너 (2009)는 오나라의 인구가 한나라 인구의 약 1/6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238년과 280년에 주어진 숫자보다 훨씬 많을 수 있으며,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인구 조사 방법 때문일 수 있다.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상고 한어 고대 강동 중국어 원시 오어 |
종교 |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
통치 및 리더십 | |
통치자 칭호 | 왕 (222년–229년) 황제 (229년–280년) |
군주 | 손권 (222년 11월 – 252년 5월) 손량 (252년 5월 – 258년 11월) 손휴 (258년 11월 – 264년 9월) 손호 (264년 9월 – 280년 5월) |
화폐 | |
통화 | 중국 동전 중국 오수전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조위 |
이후 국가 | 서진 |
2. 역사
손견과 손책이 쌓아 올린 기반을 바탕으로, 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오나라(동오)가 건국되었다. 손권은 촉한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에 대항하는 한편, 장강 유역 개발과 해상 무역을 통해 국력을 강화했다.[1] 그러나 황제 즉위 후 독단적인 통치와 후계자 선정 실패로 인해 오나라는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손권은 춘추 시대 병법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진 손견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이룩한 기반을 이어받아, 208년 적벽 대전에서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며 강남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후 형주를 둘러싸고 유비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221년 촉한의 침공을 육손을 파견해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다시 유비와 화해하는 등 유연한 외교술을 발휘했다.[1]
황제 즉위 후, 손권은 점차 독단적이고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 공손연과의 화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주(夷州) 원정은 큰 손실만 초래했다.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후계자 문제였다. 태자 손등이 요절한 후, 손권은 손화를 새로운 태자로 삼았지만, 동시에 손화의 동생 손패를 총애하여 신하들 사이의 권력 다툼을 유발했다. 이 과정에서 육손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이 희생되었고, 이는 오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10]
손권 사후, 제갈각과 손준, 손침 등이 권력을 장악하며 정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258년 손량이 폐위되고 손휴가 즉위하여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64년 손호가 즉위한 후에는 폭정과 사치로 인해 민심이 이반되었고, 결국 280년 진나라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면서 오나라는 멸망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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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건국 이전

후한 말, 군벌 손견의 장남 손책과 그의 추종자들은 군벌 원술에게 군사를 빌려 일련의 군사 정벌을 시작하여 유요, 엄백호, 왕랑과 같은 군벌이 점령했던 여러 영토를 점령했다. 손책은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원술과의 관계를 끊었다. 후한 조정의 사실상 정부 수반이었던 군벌 조조는 헌제에게 손책에게 "오후(吳侯)"의 작위를 수여하도록 요청했다.
200년 여름, 손책은 암살당했고, 그의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다. 손권은 형처럼 오 영토에 대한 자치 통치를 유지하면서 헌제에게 명목상 충성을 바쳤다. 208년, 손권은 군벌 유비와 동맹을 맺고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했다. 손권과 유비는 형주를 놓고 영토 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이후 약 10년 동안 조조에 대항하는 동맹을 유지했다. 219년, 손권은 여몽을 보내 유비의 형주 영토를 침공하면서 유비와의 관계를 끊었다. 유비의 형주 자산을 방어하던 관우는 손권의 군대에 의해 생포되어 처형되었다. 그 후 손권의 영토는 강동 지역 너머로 확장되어 현재의 후난성과 후베이성 일부를 포함하는 형주의 남부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조비는 헌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조위를 건국하여 후한 왕조를 끝냈다. 손권은 위나라에 항복하여 조비로부터 봉신 왕인 "오왕(吳王)"의 작위를 받았다. 1년 후, 유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건국했다. 222년, 유비는 형주를 되찾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손권에 대한 군사 작전을 시작하여 이릉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유비는 손권의 장군 육손에게 참패를 당하고 백제성으로 후퇴해야 했고, 1년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유비의 후계자 유선과 그의 섭정 제갈량은 나중에 손권과 화해하고 이전 동맹을 재확인했다. 손권은 222년에 위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229년 스스로 "오 황제"를 칭할 때까지 "오왕"으로 통치했다. 그의 정통성은 촉나라에 의해 인정받았다.
2. 1. 1. 손견과 손책의 강동 평정

후한 말, 군벌 손견의 장남 손책과 그의 추종자들은 군벌 원술에게 군사를 빌려 194년부터 199년까지 강남과 오 지역에서 일련의 군사 정벌을 시작하여 유요, 엄백호, 왕랑과 같은 군벌이 점령했던 여러 영토를 점령했다.[25] 손책은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한 후, 후한의 명목상 통치자인 헌제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되어 196~197년경에 원술과의 관계를 끊었다.[25] 후한 조정의 사실상 정부 수반이었던 군벌 조조는 헌제에게 손책에게 "오후(吳侯)"의 작위를 수여하도록 요청했다.[25]
손견은 오나라의 호족 출신이었다. 손견의 집안은 대대로 오군 부춘현(저장성)에서 관리를 지냈으며, 가문이 중시되었던 후한의 정계에서는 경시되었다(다만 위소의 『오서』에 따르면, 손견 일족은 『손자』의 저자 손무의 후손이라고 칭하며, 대대로 작은 관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25] 황건적의 난에서는 주준의 휘하에 들어가 공적을 세워 별부사마(별동대의 지휘를 맡는 무장)가 되었다.[25] 전후에도 변장・한수의 반란 진압에 공적을 세워 장사태수에 임명되었다.[25]
189년 낙양에서 동탁이 폭정을 저지르고 관동 제후들의 반감을 사,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손견도 출병했다.[25] 그 와중에 무릉 태수 조인이 광록대부 온의의 격문을 위조하여 손견에게 보냈다. 그 격문에 따라 형주자사 왕예・남양 태수 장자 등을 살해하고, 그대로 남양으로 쳐들어간 원술의 휘하에 들어갔다.[25]
연합군은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희미했지만, 원술과 손견은 동탁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반복하여 동탁의 무장 화웅을 물리치고, 여포를 격퇴했다.[25] 그 후,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역대 황제의 능묘를 훼손하여 서쪽 장안으로 떠나갔다. 손견은 주인이 없어진 낙양에 들어가 복구와 능묘 수복에 힘썼다.[25] 이 전후에 예주자사 공주가 죽었기 때문에, 손견은 원술의 상소에 의해 행파로장군(파로장군 대행)・예주자사의 지위를 얻었다.[25]
그러나 원소는 손견을 예주자사로 인정하지 않고, 예주자사로 주우를 보내 원술・손견 등과 대립했다.[25] 이로 인해 연합군은 완전히 붕괴되고, 원술・손견은 원소・주우와 예주를 두고 전쟁을 벌였다.[25] 반격 기회로 본 동탁은 낙양을 재점령하기 위해 주준을 보냈지만, 주준은 동탁을 배신하고 원술에게 항복하여 중모에 주둔했다.[25]
형주자사 유표는 반동탁 연합군 결성 당시에는 원술과의 관계가 양호했지만, 이원(二袁)의 다툼에서 원소 측에 섰기 때문에 관계가 악화되었다. 원술은 유표 토벌에 나섰다. 191년 혹은 192년, 손견은 상양으로 침공하여 유표의 부장인 황조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추격 도중에 유탄(일설에는 낙석)에 맞아 사망했다(상양 전투).[25]
손견이 죽은 후, 그의 군단은 조카 손분의 지휘 아래 원술에게 들어갔고, 장남 손책은 병력을 빼앗겨 힘을 잃었다.[25] 그러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재기하여, 원술에게 받은 1,000여 명의 병사를 바탕으로 강동(장강의 동쪽, 장쑤성・안후이성)의 유요・왕랑 등을 격파하고, 강동을 제패했다.[25] 손책 주변에는 정보・황개・한당 등 손견 시대부터의 부하에 더해, 주유・태사자・장소・장굉・노숙 등의 인재가 모여들었고, 세력 확장을 보고 "항우와 닮았다"라고 평했다.[25]
197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했다.[25] 큰 세력을 축적하여 더 이상 원술을 따를 이유가 없었던 손책에게는 천우신조였고, 원술과 절교하고 헌제를 손에 넣고 도의적 정당성을 얻고 있던 조조에게 붙기로 했다.[25] 조조도 사방에 적을 안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이를 기뻐했고, 조조 동생의 딸이 손책의 동생 손광에게 시집가면서 동맹이 성립되었고, 손책은 토역장군・오후의 지위를 얻었다.[25] 손책은 장강 북쪽에 있는 유훈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원수인 황조를 격파했다.[25]
200년, 북쪽의 조조는 원소와의 관도 전투에 돌입했고, 수도 허창의 방어는 얇아졌다.[25] 이를 틈타 손책은 허도 침공 작전을 계획한다. 그런데 그 무렵, 손책은 과거에 살해했던 허공의 아들과 그 식객들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목숨을 잃는다.[25] 조조의 막료인 곽가는 "손책은 강동을 제패했지만, 아직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았고, 조만간 자객에게 살해될 것이다"라고 말했다.[25]
그 뒤를 이은 것은 동생 손권이었다. 손권은 손책으로부터 "병사를 이끌고 싸움에서 이겨 천하를 다투는 것은 내가 낫지만, 인재를 잘 써서 강동을 지키는 것은 네가 낫다"고 평가받았다.[25] 그 말대로 손권은 뛰어난 심리 조작술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급격한 팽창 후 손책의 죽음으로 분열될 뻔했던 (실제로 노강 태수 이술의 자립이나 일족의 손보·손고의 모반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손오 세력을 잘 다스려 손권의 지배는 안정되었다.[25]
2. 1. 2. 손권의 기반 강화
손견과 손책의 기반을 이어받아, 200년에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다. 손권은 뛰어난 심리 조작술로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손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지배력을 안정시켰다.손권은 산월 등 이민족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특히, 제갈각, 육손, 하제 등은 산월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오나라 건국 이전부터 거주하던 한족(종부, 종오)들의 저항도 억눌러야 했다.
208년, 손권은 아버지 손견의 원수인 황조를 죽였다. 같은 해, 조조가 남하하여 유비를 몰아내고 강동으로 침공해 오자, 손권은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 대전에서 조조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 승리로 장강 이남에서 손오 세력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이후 손권은 형주 영유권을 두고 유비와 대립했다. 219년, 여몽과 육손이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 남부를 차지하면서, 위, 오, 촉의 삼국 정립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 2. 동오의 건국과 발전
229년, 손권은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오(吳)로 정했으며, 수도를 건업(현재의 난징)으로 옮겼다.[1] 손권은 촉한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에 대항하며,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장강 유역 개발과 농업 생산력 증대에 힘쓰고, 해상 무역을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했다.[1]손권은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 덕분에 처음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손견은 춘추 시대 병법가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17세 때 해적을 퇴치하여 유명해졌다. 이후 관리로서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원술의 후원 아래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했지만, 192년 유표를 공격하다가 사망했다. 손견의 영지와 병사는 원술에게 흡수되었으나, 황개, 정보, 주치 등은 맏아들 손책을 계속 받들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동오의 창업왕으로, 원술 밑에서 독립하여 주유와 함께 세력을 확장했다. 장소, 장굉, 태사자, 여몽, 주태, 장흠 등 문무 관리가 그의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200년, 손책은 허공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손책은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내정은 장소, 군사는 주유에게 맡겼다.
19세의 손권은 동오의 후왕이 되어 손책의 신하들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노숙, 제갈근, 감녕, 서성 등도 합류했다. 208년 적벽 대전에서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를 격파했다. 219년 관우를 공격하여 형주를 독점하고, 조조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221년 촉한의 침공을 육손을 파견하여 저지했으나, 이듬해 유비와 화해했다.
황제를 칭한 후 손권은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공손연과의 화친 시도는 실패했고, 이주(夷州) 원정은 큰 손해를 보았다. 후계자 선정 실패는 오나라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
태자 손등 사후, 손화를 태자로 세웠으나 동생 손패도 총애하여 신하들이 분열되었다. 육손은 적서 차별을 간언했지만, 손권은 듣지 않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을 유형에 처했다. 250년 손화를 폐하고 손패에게 자결을 명한 뒤, 막내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은 계속되었다.
손권 사후, 제갈각은 선정을 펼쳤으나 동흥 전투 승리 후 교만해져 합비신성 전투에서 대패했다. 손준이 제갈각을 죽이고 실권을 잡았으나, 만행을 벌여 오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손준 사후, 손침이 권세를 이어받았으나 제갈탄의 난을 제대로 돕지 못했다. 258년 손량은 손침을 주살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었다. 손권의 여섯째 아들 손휴가 황제로 옹립되니, 이가 곧 오 경제(景帝)이다.
경제는 조세 감면, 관리 등용 제도 실시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말년에는 장포와 복양흥에게 정무를 위임했고, 이들은 악정을 펼쳤다. 264년 경제 사후, 손화의 아들 손호가 옹립되었다.
2. 3. 동오의 쇠퇴와 멸망
손권은 황제 즉위 후 점차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고, 후계자 선정 실패는 오나라 쇠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태자 손등이 사망한 후, 손권은 손화를 새로운 태자로 세웠으나, 동시에 손화의 동생 손패를 노왕(魯王)으로 봉하고 태자와 동등하게 대우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 권력 다툼을 벌였다. 육손은 적자와 서자 사이의 차별을 강조하며 간언했지만, 손권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손패파의 참언을 믿어 육손을 유형에 처했고, 육손은 곧 분사하였다. 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많은 유능한 신하들이 희생되었다.[10]적오 13년(250년),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내쫓고 손패에게 자결을 명했으며, 막내아들 손량을 태자로 결정했다. 그러나 신하들 간의 파벌 싸움은 폐제 시대까지 이어져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10]
손량이 즉위한 후, 제갈각이 정권을 장악하여 처음에는 선정을 펼쳤으나, 동흥 전투 이후 교만해져 무리한 군사 행동으로 민심을 잃었다. 결국 손준이 손량과 공모하여 제갈각을 제거하고, 손준은 실권을 쥐고 만행을 벌여 오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손준 사후, 그의 종제 손침이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제갈탄의 난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10]
영안 원년(258년), 손량은 손침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폐위되었으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 손휴가 황제로 옹립되었다(오 경제). 경제는 초기에는 개혁을 시도했으나, 말년에는 측근들에게 정무를 위임했고, 이들의 악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10]
원흥 원년(264년), 경제가 사망하고, 폐태자 손화의 아들 손호가 옹립되었다. 손호는 초기에는 백성을 위한 조치를 취했으나, 이후 폭정을 일삼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간신들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졌다.[10]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항복했고 오나라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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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
오나라에서는 문관과 학자들이 국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정책 결정은 주로 군사 지휘관들이 맡았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오나라 군대는 행정 지원을 필요로 했으며, 라페 드 크레스피니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은 "전투 능력이나 야전 지휘 능력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조언자로 인정받았다."[15]
손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조언자와 비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필요했다. 손권은 적대 세력 및 우호 관계를 능숙하게 처리하여 오나라 황실 정부를 통제된 형태로 만들었다. 또한, 손권은 오나라 사람들이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며 제국 전역과 주변 세력에서 명성과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15]
226년 조비가 사망한 후, 손권은 위나라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하여 농업에 집중하도록 장려했다.[16] 그러나 육손은 군 지휘관들이 토지 개척에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손권은 이를 즉시 수용하여 자신과 아들들이 육손의 상소를 실행하도록 했다.[17] 하지만 240년, 손권은 육손의 생각을 억제하고 다시 농업에 집중했는데, 이는 오나라가 심각한 기근을 겪었기 때문이다.[18] 234년, 제갈각이 남쪽의 업무를 통제했을 때, 그는 식민화 명령을 무시하고 적을 굶겨 굴복시키는 농업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했다.[19]
오나라의 통치 아래, 양쯔강 삼각주 지역은 이전에는 야만적인 "정글"로 여겨졌지만, 중국의 상업, 문화, 정치 중심지 중 하나로 발전했다. 남부 오나라의 업적은 중국 문명이 제국의 최남단까지 도달했음을 의미한다.[20]
230년, 손권의 통치 기간에 중국인들은 이주(Yizhou) 섬에 도착했다.[21] 오나라 해군이 "이주"()라는 섬에 파견한 관리들과 원주민과의 접촉은 타이완을 의미할 수 있지만, 이주의 위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타이완이라고 믿는 반면, 다른 역사가들은 류큐 열도라고 믿는다. 오나라 상인들은 남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도 도달했을 수 있다. 공손연이 사마의의 요동 정벌로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나라가 그를 보호하는 데 실패한 것은 수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나라에 부담을 주었고, 타이완에서 얻었다고 여겨지는 업적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손권은 그의 신하를 잃었다.[22]
오나라는 양주의 비한족인 산월을 여러 차례 토벌하여 항복한 산월 백성을 오나라 호적에 편입하고, 병사로서 자질이 높은 자들을 대량으로 징병했다.
3. 1. 중앙 정치
동오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유지했다. 승상, 태위, 사공 등의 3공(三公)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설치하고, 중앙 관료제를 통해 행정을 담당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중앙 정부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조정 밖에서는 유력 가문들이 그들만의 독립적인 권위를 과시했다.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국가 운영에 참여시켰다.[20]위의 등애는 "오(吳)의 명가·호족은 모두 사병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세·세력을 믿으면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와카츠 요시오는 "오(吳)의 장군은 부자 형제 간에 병력의 세습이 인정되었다. 이 제도는 세병제라고 불린다. 오(吳)의 장군들은 세습을 허락받은 사병적인 둔전 군을 가지고 미개발 지역에서 엄격한 군정 지배를 행했다. 둔전군은 토지 개발(개척)의 선봉이었다"고 말한다.
3. 2. 지방 통치
오는 주(州), 군(郡), 현(縣)으로 이어지는 지방 행정 제도를 운영했다. 다음은 오나라의 영토를 나타낸 표이다.주 | 주도 | 군 | 군도 | 현 개수 |
---|---|---|---|---|
양 | 건업(현재 난징) | 단양 | 건업 | 16 |
오 | 오현 | 10 | ||
기춘 | 기춘 | 2 | ||
회계 | 산음현 | 10 | ||
예장 | 남창 | 16 | ||
여강 | 완현 | 2 | ||
여릉 | 고창현 | 10 | ||
파양 | 파양현 | 9 | ||
신도 | 시신현 | 6 | ||
임천 | 남성현 | 10 | ||
임해 | 장안현 | 7 | ||
건안 | 건안현 | 9 | ||
오흥 | 오성현 | 9 | ||
동양 | 장산현 | 9 | ||
필릉 | 필릉현 | 3 | ||
남여릉 | 우도현 | 6 | ||
형 | 강릉(현재 징저우) | 남 | 강릉 | 9 |
무릉 | 임원현 | 11 | ||
영릉 | 천릉현 | 10 | ||
계양 | 郴縣 | 6 | ||
장사 | 임상현 | 10 | ||
무창 | 무창현 | 6 | ||
안성 | 안성현 | 6 | ||
팽택 | 팽택현 | 4 | ||
의도 | 이도현 | 3 | ||
임하 | 임하현 | 6 | ||
형양 | 상남현 | 10 | ||
상동 | 영현 | 6 | ||
건평 | 무현 | 6 | ||
천문 | 루중현 | 3 | ||
소릉 | 소릉현 | 5 | ||
시안 | 시안현 | 7 | ||
시흥 | 곡강현 | 7 | ||
광 | 번우(현재 광저우) | 남해 | 번우현 | 6 |
창오 | 광신현 | 11 | ||
율림 | 부산현 | 9 | ||
고량 | 사평현 | 3 | ||
고흥 | 광화현 | 5 | ||
계림 | 무안현 | 6 | ||
북합포 | 안광현 | 3 | ||
교 | 롱비엔 | 교지 | 롱비엔 | 14 |
일남 | 주오 | 5 | ||
구진 | 서포 | 6 | ||
합포 | 합포현 | 5 | ||
무평 | 무녕 | 7 | ||
구덕 | 구덕 | 6 | ||
신창 | 가녕 | 4 | ||
주야 | 서문현 | 2 |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고, 토착 세력과의 협력과 견제를 통해 지배력을 강화했다. 위나라의 등애는 "오(吳)의 명가·호족은 모두 사병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세·세력을 믿으면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와카츠 요시오는 "오(吳)의 장군은 부자 형제 간에 병력의 세습이 인정되었다. 이 제도는 세병제라고 불린다. 오(吳)의 장군들은 세습을 허락받은 사병적인 둔전군을 가지고 미개발 지역에서 엄격한 군정 지배를 행했다. 둔전군은 토지 개발(개척)의 선봉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나라는 양주의 비한족인 산월을 여러 차례 토벌하여 항복한 산월의 백성을 오(吳)의 호적에 편입하고, 병사로서 자질이 높은 자들을 대량으로 징병했다. 이들과의 융합을 통해 강남 지역의 개발을 추진했다.
3. 3. 군사 제도
는 세병제를 채택하여 병사들의 신분을 세습시키고 특정 가문이 군대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했다.[1] 인구에 비해 많은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총 병력은 23만에서 3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위의 등애는 "오(吳)의 명가・호족은 모두 사병을 소유하고 있으며, 군세・세력을 믿으면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가와카츠 요시오는 "오(吳)의 장군은 부자 형제 간에 병력의 세습이 인정되었다. 이 제도는 세병제라고 불린다. 오(吳)의 장군들은 세습을 허락받은 사병적인 둔전 군을 가지고 미개발 지역에서 엄격한 군정 지배를 행했다. 둔전군은 토지 개발(개척)의 선봉이었다"고 말한다.
오(吳)는 양주의 비한족인 산월을 여러 차례 토벌하여 항복한 산월 백성을 오(吳)의 호적에 편입하고, 병사로서 자질이 높은 자들을 대량으로 징병했다.
이후 오나라 말기에는 군대가 약화되었다. 합비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지만, 오나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230년대 이후, 위나라가 합비에 건설한 요새화된 성인 "신성" 때문에 더욱 어려워졌다.[22] 255년과 250년대 말, 관구검과 문흠이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나라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제갈탄이 대규모 전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오나라 군대는 큰 패배를 겪었다.[22]
263년 위나라의 촉 정복 동안, 오나라는 베트남의 반란 때문에 동맹국을 완전히 지원할 수 없었다.[23] 오나라의 쇠퇴는 245년 노숙의 죽음과 252년 손권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제갈각은 253년 합비에 대한 실패한 침공 이후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를 물리친 후 손준에게 암살당했다.[24] 정봉은 손휴의 명령에 따라 손침을 죽였다. 부패가 오나라를 괴롭혔고, 이는 280년 진나라에 의한 오나라 정복으로 이어졌다.
4. 경제
오(吳)는 강남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 경제가 발전했으며, 둔전(屯田) 설치와 수리 시설 확충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26]
해상 무역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중동 등과 교역하며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26] 손권은 화폐 경제 발전을 위해 오수전을 주조하여 유통시켰고,[26] 오의 화폐는 서진(晋)에 항복한 후에도 동진에서 조위(魏)나 진(晋)의 화폐와 혼용되었다.[27][28]
4. 1. 농업
오(吳)는 강남 지역의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자원을 바탕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수리 시설을 확충하는 등 농업 생산력 증대에 힘썼다.[26]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 경제가 발전하고, 다양한 작물들이 재배되었다. 전란의 영향이 적고 동산(銅山) 등을 보유했던 오는 후한(後漢)의 세제(전납의 중시)나 화폐 경제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26]4. 2. 상업
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대외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중국 내부의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중동 등과도 교역했다.[26] 화폐 경제가 발전하여, 자체적인 화폐를 주조해 유통시켰다.손권은 236년에 오수전 500매, 238년에 오수전 1000매의 가치를 가진 화폐를 발행하여 화폐 경제의 충실을 도모했다.[26] 오의 화폐는 진(晋)에 항복한 후에도 사용되었던 듯하며, 동진에서는 오의 화폐가 유통되어 위(魏)나 진(晋)의 화폐와 혼용되어 오수전 1매의 가치를 가지고 유통되었다.[27][28]
5. 외교 관계
촉한() 및 조위(曹魏)와 함께 삼국 시대를 형성한 동오는 이들과 대립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초기에는 촉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에 대항했으나, 형주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1] 위나라와는 지속적으로 대립하며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1] 소정 전투 이후, 그리고 220년대 조위의 동오 침공 당시, 촉은 오나라와 무역 및 관계를 재건할 수 있었다.[10] 촉의 면화는 오나라에 크게 유입되었고, 조선, 소금, 금속 산업의 발전이 크게 증가했다.[10]
5. 1. 위, 촉과의 관계
촉한() 및 조위(曹魏)와 함께 삼국 시대를 형성한 동오는 이들과 대립과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초기에는 촉과 동맹을 맺고 위나라에 대항했으나, 형주 영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1] 위나라와는 지속적으로 대립하며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1]손권 사후, 제갈각과 손준이 섭정을 맡았으나, 253년 제갈각은 손준의 쿠데타로 암살당했다.[1] 이후 권력은 손준과 그의 사촌 손綝에게 넘어갔다.[1] 손량 치세 동안 위나라에서 두 차례 반란이 일어났을 때, 손준과 손綝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반란군을 지원했으나, 두 반란 모두 진압되고 오나라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1]
258년, 손량은 손綝에 의해 폐위되고 손휴가 즉위했다.[1] 손휴는 장포, 정봉의 도움을 받아 손綝을 제거했다.[1] 264년, 촉나라가 위나라에 의해 정복된 후 손휴가 사망하고, 보양흥, 만욱, 장포는 손호를 황위에 앉혔다.[1]
손호는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차 폭정을 일삼았다.[1] 육개, 육항 등의 노력으로 오나라는 비교적 안정되었으나, 279년 진나라의 공격에 280년 5월 31일 항복하여 멸망했다.[1]
소정 전투 이후, 그리고 220년대 조위의 동오 침공 당시, 촉은 오나라와 무역 및 관계를 재건할 수 있었다.[10] 촉의 면화는 오나라에 크게 유입되었고, 조선, 소금, 금속 산업의 발전이 크게 증가했다.[10]
6. 역대 군주
7. 연표
서력 | 사건 |
---|---|
156년 | 손견 출생 |
184년 | 손견, 황건적 토벌 |
190년 | 손견, 반동탁 연합군 가담 |
192년 | 손견, 유표 공격 중 전사. 아들 손책이 뒤를 이음 |
194년 | 손책, 원술 휘하에 들어감 |
197년 | 손책,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절교 |
200년 | 손책, 자객에게 습격당해 사망. 동생 손권이 뒤를 이음 |
208년 | 손권,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 격파 |
209년 |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과 혼인 |
213년 | 조조와 유수에서 전투 |
215년 | 합비에서 장료에게 기습당해 대패 |
217년 | 손권, 조조와 화친 |
219년 | 손권, 관우를 죽이고 형주 평정 |
221년 | 손권, 오왕으로 책봉 |
222년 | 촉한과 국교 회복 |
223년 | 위나라와 국교 단절 |
228년 | 육손, 석정에서 조휴 격파 |
229년 | 손권, 황제 즉위 |
241년 | 태자 손등 사망. 손화를 태자로 책봉 |
250년 | 태자 손화 폐위, 손량을 태자로 책봉 |
252년 | 손권 사망. 손량 즉위 |
257년 | 제갈탄의 반란에 원군 파견, 진압됨 |
258년 | 손량 폐위. 손휴 즉위 |
264년 | 손휴 사망. 손호 즉위 |
280년 | 진나라에 항복, 오나라 멸망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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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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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논문
[25]
문서
これまで呉と蜀漢は、魏の支配地にも名目上の王・州牧を置いていたが、相手国の領地とされた州からは、これを引き揚げ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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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孫呉貨幣経済的結構和特点
[27]
간행물
孫呉貨幣経済的結構和特点
[28]
간행물
晋代貨幣経済の構造とその特質
2010-07
[29]
문서
강승회에 의해 전래됨
[30]
문서
《진고》(眞誥) 권20에 주석으로 인용된 《허장사세보》(許長史世譜)에 기록이 있으나, 재임 시기는 알 수 없다. [[연 (동오)|연]]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1]
문서
《[[수서 (책)|수서]]》(隨書) 경적지(經籍志)에 기록이 있으나, 재임 시기는 알 수 없다.
[32]
문서
책봉 기록은 있으나, 이름과 시호 모두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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